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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2023 대한민국 실내악 작곡제전 II 리뷰_ 음악춘추2023_7월호 2023-07-12 735

음악적 상상: 보는 음악, 듣는 음악


강서희

음악학 박사





음악은 시대를 반영한다. 그런 의미에서 동시대 작곡가의 작품은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음악 장르 중에서도 실내악은 악기편성이 다양하고 음색이나 표현양식, 연주기법 등을 더 섬세하게 다룰 수 있다는 점에서 작곡가와 연주자의 상상력이 무한히 펼쳐지는 공간이다. 한국에 서양음악이 유입된 지 100년이 훌쩍 지난 지금, 국내에서 클래식 음악은 여전히 소수의 문화이지만, 우리 세대의 클래식 음악가들은 해외에서 더 주목할 정도로 성실하고 훌륭하게 각자의 길을 걸어오고 있다. 16년이 넘도록 자리를 지켜온 “대한민국 실내악 작곡제전(이하 대실작)”은 우리 음악가들의 사유와 표현의 장이자 창작의 산실로서 대한민국의 음악 역사를 지탱하는 힘이 되어왔다.  


지난 5월 31일 예술의 전당 리사이틀홀에서 “2023 대한민국 실내악 작곡제전(이하 대실작)”의 두 번째 연주회가 열렸다. 지난해 (사)한국작곡가협회 산하 단체에서 연주되었던 6개 작품과 원로작곡가 김순애 님의 가곡이 함께 연주되었다. 스물한 명의 연주자가 선사한 일곱 무대는 말 그대로 총천연색이었다. 악기의 음색과 주법을 변형한 실험적 작품들, 고려가요 주제에 의한 노래에 무용이 융합된 작품, 인터넷 밈에서 시작된 풍자적인 작품, 역사적인 소재 혹은 문학작품에 기초하여 악기를 의인화한 음악극 스타일의 작품과 한국전쟁 직후에 창작된 가곡까지 이날 공연은 거의 모든 시대와 장르, 모든 지역의 문화가 뒤섞인 종합선물세트 같았다. 


이날 연주는 박은경(미래악회) 님의 ‘피아노 독주를 위한 운용’으로 시작되었다. 주먹으로 건반을 내리치는 톤-클러스터, 현악기의 하모닉스 사운드를 연상시키는 고음역대의 호모포니, 카프리치오 스타일의 화려한 멜리스마 등의 표현기법은 피아노 소리의 다채로운 질감과 색채, 음향을 들려주었다. 큰 채로 피아노의 몸통을 징처럼 치거나 자리에서 일어나 현을 손으로 뜯는 등 피아니스트의 이색적인 제스처는 피아노를 연주하고 그 소리를 청취하는 방식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었다.

 

문지은(뮤지콘) 님의 ‘두 대의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연습, 실험’은 시간과 경험에 관한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었다. 서로 호흡을 맞추기 위해 세 명의 연주자는 같은 템포로 박자를 세고 있으나, 그들이 연주하는 세 개의 단선율은 제각각 자유롭고 변화가 많은 리듬이었다. 마치 규칙적으로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느끼는 불규칙적이고 불완전한 삶에 대한 느낌들처럼 세 명의 연주자는 같은 시공간에서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표현하는 듯했다.


세 번째 작품은 이복남(동서악회) 님의 ‘고려가요 주제에 의한 2개의 노래: 송인(送人)_<서경별곡>, 색·계(色·戒)_<쌍화점>’이었다. 이 무대는 전통적인 소재를 융합예술형태로 재구성하는 좋은 예시를 보여주었다. 첫 번째 곡은 대동강 나루터에서 임과 이별하는 장면을, 두 번째 곡은 회회아비, 삼장사의 사주, 술집 아비와 밀회장면을 노래하였다. 후렴구 ‘아즐가, 위 두어렁셩 두어령성 다링디러리’와 ‘다로러거디러, 더러둥셩, 다리러디거’로 말로 다 할 수 없는 연인들의 사랑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들려주었다. ‘색·계(色·戒)_<쌍화점>’에는 남녀 무용수도 함께 등장하였다. 목탁 소리로 시작되는 두 번째 장면에서 이불 모양의 세트를 끌고 나온 이들은 마치 여러 장의 스틸 컷을 이어붙인 애니메이션처럼 분절된 형태의 독특한 춤사위를 보여주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장면 사이에 기악으로만 연주되는 부분에서는 꿈틀거리는 해금 소리와 유연한 춤사위가 더해져 관능적인 분위기를 더하였다.  


박명황(향신회) 님의 ‘알토 색소폰과 피아노를 위한 실례지만 지금 불타고 계십니다’는 격앙된 상대에 대한 냉소적인 리액션으로 한동안 유행했던 인터넷 밈(meme)에서 시작된 곡이다. 고난이도의 화려한 악구를 연주하는 알토 색소폰 연주자의 손과 간간히 sf로 톤 클러스터를 연주하는 작곡가의 손은 몹시 흥분한 채 관절이 시큰거리도록 채팅창을 두드리다가 사납게 엔터를 치는 인터넷 유저의 손과 중첩되어 코믹하고 유머러스하게 느껴졌다. 후반부에서 느린 템포의 유연하고 서정적인 재즈풍으로 전환된 음악은 ‘이제 긴장 풀고 유연하게 살자’라는 작곡가의 메시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이의진(작곡동인 델로스) 님의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길 위에서’는 친구, 동행, 삶의 지속성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작품으로 미니멀리즘 음악으로 완성되었다. 같은 악구가 반복되는 것은 반복되는 일상을, 그 안에 나타나는 다양한 변화들은 삶이라는 길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비춰주었다. 


강미정(한국여성작곡가회) 님의 ‘플루트, 첼로, 북, 피아노를 위한 꺼래이’는 1920년대에 창작된 박신애 님의 소설에 기초한 작품으로 식민지의 애환과 한국인의 비참한 생활을 보여주었다. 비장하게 시작된 북소리는 낮고 무겁게 깔리는 첼로 소리, 맑게 울려퍼지는 종소리, 넓은 음역대를 오가는 플루트, 서정적이면서도 긴장감이 감도는 피아노 음악으로 퍼져나가 식민지 시대에 주인공 순이가 겪었던 설움과 의지를 드라마틱하게 표현하였다. 


마지막 무대는 원로작곡가 김순애 님의 ‘사랑’(1959)과 ‘사월의 노래’(1953)였다. 금아 피천득 선생의 연작시조 ‘금아연가’에 기초한 ‘사랑’은 찬란한 봄빛이 만연한 계절, 멀리 떠난 님 생각에 슬픔에 빠진 여인의 모습을 조명하였다. 청록파 시인 박목월 님의 시에 기초한 ‘사월의 노래’는 한국전쟁이 끝나갈 무렵 새로운 생명을 품고 다시 돌아온 4월을 보여주었다. 서정적이면서도 희망에 찬 가사 내용과 달리 의도적으로 강박을 누그러뜨리는 성악선율과, 음악의 방향을 자꾸 와해시키는 화성구조는 여전히 전쟁의 참혹함과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작곡가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모든 작품 속에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었다. 소리와 모양새가 다를 뿐 모든 작품은 나름의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보여주고 들려주었다. 다양한 주제만큼이나 다채로운 연주기법과 표현양식이 혼재하는 이 날 연주를 통해 필자는 우리 세대 작곡가들이 단순히 듣는 즐거움을 넘어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총체적 인지 활동으로서의 음악을 지향함을 알 수 있었다. 작곡가로부터 시작된 음악적 상상은 연주자를 통해 실체를 갖게 되고 관객으로부터 다양한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결국, 하나의 작품은 그것과 만나는 모든 사람의 이야기를 품게 되는 것이다. 새롭게 창작된 작품들이 더 많은 사람과 만나기를 바란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새로운 삶을 향한 용기와 지난 시간에 대한 위로를 얻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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