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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2023 대한민국 실내악 작곡제전 V 리뷰_ 음악춘추2024_1월호 2023-11-29 393


음악의 위로



백은실

음악학자


세상에는 현상을 바라보는 여러 가지 시선이 있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도 과학자, 수학자, 작가, 음악가 등이 보는 시선은 각양각색이다. 약 2년 전, 예일대학교 교수를 은퇴한 수학자 마이클 프레임(Michael Frame)은 자신이 경험한 상실의 조각을 선과 점으로 나타낸 에세이를 발간했다. 그는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하고 비탄에 빠지는데, 이를 자신에게 익숙한 수학적 언어로 치환하기 시작한다. 공식, 그래프와 같은 여러 가지 수학적 원리를 통해 어지럽게 산재한 아픔들이 정리되기 시작하고, 더 나아가 그는 위로받는다. 이 책이 바로 『수학의 위로』(Geometry of Grief, 2022)이다. 수학이라는 렌즈로 그의 인생을 조망했던 프레임을 보며, 지난 11월 29일(수)에 예술의전당 리사이틀홀에서 열린 ‘대한민국 실내악 작곡 제전’을 생각해 보게 된다.


창작곡의 소재는 무수히 많지만, 이날 연주된 여섯 작품은 모두 작곡가 자신이 겪은 경험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었다. 각자의 경험은 삶에 대한 고찰이기도 하고 시대 상황에 대한 통탄이기도 했다. 작곡가 여섯 명이 내는 목소리는 음악적 언어로 치환되어, ‘주제’ 혹은 ‘형식’으로 드러났다.


신지수의 현악 4중주 <구도자의 노래>에는 작곡가의 목소리가 ‘형식’으로 드러났다. 그는 “인생사의 크고 작은 일들에 극단적으로 휘말리지 않고 수도사처럼 감정을 다스리며 평정심을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을 담기 위해 이해인 수녀의 시 ‘구도자의 노래’를 참고했다. 시작부가 C장조의 기반 속에서 제시되지만, 점차 침범해 오는 불협화의 짙은 분위기로 조성의 정체성을 점차 잃어갔다. 그러나 작품의 마지막에는 C장조와 관계조인 A단조로 회복하며 조성의 끈을 놓지 않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평정심을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은 회복되는 조성으로, “인생사의 크고 작은 일들”은 불협화음을 통해 치환되어 관객에게 전해졌다.


이한신의 클라리넷,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를 위한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는 작곡가의 생각이 ‘주제’에 담겼다. 튀르키예 대지진을 인접한 도시에서 경험한 작곡가는 재난 속에서 한 아버지와 딸의 뉴스를 듣게 된다. 무너진 건물더미에서 숨진 딸의 손을 놓지 못하던 아버지의 슬픈 사연이 브레히트의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떠올리게 했고, 그 슬픔이 이 곡의 모티브가 되었다. 작품을 위해 바흐 코랄 중 ‘절망으로부터’의 첫 8마디 선율을 주제로 가져오고, 그 선율을 연속적으로 변형, 변주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주제의 처음과 끝을 구성하는 구조 음이 작품 전체의 뼈대가 되어 그 영향력을 뻗쳤다.


백영은의 세 대의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를 위한 <내일의 기억 주제에 의한 파사칼리아>는 삶에 대한 고찰이 ‘주제’에 담겼다. 네 마디 남짓한 주제는 그 안에 정격선율과 이것의 역행형을 포함했다. 주제에 자신의 역행형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미래(내일)로 진행되자마자 과거(기억)로 돌아오는 일종의 상징성을 가지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파사칼리아’로 변주곡의 형식을 따르는 이 작품에서 주제가 끊임없이 반복됐다. 반복되는 주제는 여러 가지 형태로 변형되는데, 이는 작곡가가 깊이 고민한 인생의 아이러니를 잘 보여주는 듯했다.


박수정의 바이올린, 첼로, 트롬본, 피아노를 위한 <소음에 대하여>는 ‘형식’에 작곡가의 의도가 담겼다. 각종 분쟁이 난무한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지만, 서로의 의견을 듣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기에 여념이 없다.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상황을 보고 작곡가는 이것 자체를 소음이라 지칭했다. 음악에서 중심음 ‘D’는 점차 반음계적 선율, 불협화음으로 인해 흔들리고, 이내 또 다른 중심음으로 이탈해 버리기까지 한다. 중심음이 있으나 통제되지 않는 여러 요건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소음의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나인용의 피아노 5중주 <혼맥>은 작곡가의 의도가 ‘형식’에 그대로 비친 작품이었다. 작곡가에 의하면 혼맥은 “우리 민족의 영혼과 우리 가슴 속에 뛰노는 맥박”을 뜻한다. 제1악장은 혼맥의 ‘혼’, 제3악장은 혼맥의 ‘맥’에 해당하며, 여기에 우리 민족의 얼을 아악적 선율과 농악 리듬으로 표현했다. 모던 악기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현되는 소리는 우리 전통음악 못지않게 섬세한 감정을 묘사했다. 더욱이 세 개의 주요음이 전 악장을 관통하며, 악장별로 달라지는 구성 가운데서도 통일성을 가지게 해주었다.


마지막으로 연주된 원로작곡가 이연국의 플루트, 바이올린, 피아노를 위한 <세악>은 작곡가의 의도를 오롯이 음악만으로 헤아려야 하는 작품이었다. ‘세악’은 전통음악에서 소규모 편성의 음악을 일컫는데, 이것을 제목으로 사용한 데서 전통음악을 재현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전통음악에서의 지속음과 같은 소리가 그대로 재현되기보다는 단편적인 음군들을 세 악기에서 번갈아 가며 연주하는 방식으로 한 단계 변모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각 악기에서 구현되는 새로운 악기 주법들로 음향은 전통에서 더욱 멀어져갔다. 프로그램 중 가장 현대적인 음향을 구사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이 작품은, 어쩌면 작곡가의 독창적인 음악적 언어를 가장 잘 살펴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렇듯 작곡가가 사용한 소재는 주제의 동기가 되기도 하고, 주제의 구조적 원리가 되기도 하고, 혹은 작품 전체의 형식을 만드는 기초가 되기도 했다.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자주 일어나는 상황 속에서 작곡가는 이를 ‘음악’의 언어로 승화시키며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위로하고 있었다. 즉 이들은 음악이 가져다주는 위로를 적극적으로 창작해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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